Frederic Malle En Passant
초여름에 아파트 단지 앞을 지나칠 때 사라락하고 나던 라일락 향기. 약간의 흙 냄새와 이슬이 담긴 듯한 아주 싱그러운 향이 엉빠썽의 첫 인상이었습니다. 자연그대로의 라일락 향이 나는 향수를 찾던 분이라면 엉빠썽이 바로 그 향수일 거예요!
[향수] 프레드릭 말, 엉빠썽 (Fredrick malle, En passant) 리뷰
프레데릭 말의 이름만 듣고는 왠지 화려하고 장식적인 향수병을 상상했었는데요, 막상 실제 향수병과 그 패키지 디자인을 보면 매우 심플합니다. 딱 필요한 정보만 써있는 것 같다는 느낌과 미니멀한 감각이 느껴져요. 특히 향수병을 보면 가운데에 빨간 글씨로 "EN PASSANT"이라고 향수 이름이 써있고 (정확히 하자면 엉 빠썽일텐데 다들 엉빠썽이라고 붙여쓰길래 한글로는 저도 그렇게 씁니다) 그 위에는 이 향수를 조향한 조향사의 이름이 써있어요. 다른 향수 브래드들과 확실히 차별화되는 부분인데요, 밑에서 브랜드 역사와 철학을 이야기할 때 그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패키지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라벨 밑에 FREDERIC MALLE이라고 브랜드 네임 위에 브랜드의 아이덴티티가 EDITION DE PERFUME이라고-불어로 읽으면 '에디씨옹 드 퍼퓸므'라고 적혀 있어요. 퍼퓸을 책 모으듯이 하나의 에디션으로 모아간다는 의미인 것 같더라고요. 따라서 향수의 패키지도 책 표지처럼 생긴 아주 단단한 빨간 박스로 향수가 포장되어 나옵니다. 라벨에 써있는 향수명, 조향사 이름, 브랜드 네임, 철학 말고는 표지에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죠.
어퍼 이스트 사이드에서 빨간색으로 아주 강렬한 이 쇼핑백을 들고 다니자니 이 쇼핑백은 프레드릭 말 향수를 사 본 사람이라면 멀리서도 알아볼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패키지를 보면 Edition de perfume의 약자인 EDP가 (Eau de perfume 아니더라고요) 제대로 된 향수 하우스라는 프레데릭 말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브랜드를 만든 프레데릭 말의 이니셜을 FM으로 표현한 것이 미니멀한 디자인의 향수병과도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브랜드 네임인 프레데릭 말은 이 브랜드를 만든 조향사의 이름입니다. 자신의 가족들 중에선 3대째 향수 쪽 커리어를 이어오고 있는 분이라고 합니다. 프레데릭 말의 할아버지가 또한 유명한 조향사로 크리스찬 디올에서 일하셨다고 해요. 프레데릭 말에서 브랜드를 만들 때 그가 공부했던 루소 배트르랑 두퐁의 조향사들과 맺어 온 친분을 바탕으로 많은 조향사들을 영입했다고 합니다. 공식 웹사이트에 가면 브랜드 설명에도 써 있지만 전설의 조향사들이라는 섹션에 조향사들의 사진과 그들의 약력을 걸어놓고 조향사들을 아티스트로서 대접하는 브랜드 철학이 인상깊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향수병과 해당 패키지에는 그 향수를 조향한 조향사의 이름이 쓰여 있죠. 마치 책의 저자처럼요.
뉴욕에 있는 프레데릭 말 어퍼 이스트 사이드 매장에 가보면 프레데릭 말 짙은 고동색 책장들이 진열되어 있고 그 안에 향수케이스들이 빼곡하게 꽃혀 있어서 마치 누군가의 서재를 방문한 듯한 느낌이 듭니다. 한 쪽 벽면에는 조명이 환하게 들어오는 향수 장식장이 있어서 그 안에서 구매자가 선택한 향수를 꺼내줍니다. 약간 실험실 장식장 같기도 해서 전체적인 매장 분위기가 오묘했어요. 나무 책장 때문에 고풍스럽기도 하고, 과학 살험실 캐비넷같은 향수 진열장때문에 미래지향적이기도 했고요. 그 매장에는 직원이 여성분 두 분이 계셨는데, 두 분 다 나이가 어느정도 있어 보이셨고 아주 화려한 주얼리에 멋진 옷차림이었어요. 저희를 안내해 주셨던 분은 흰 머리의 프랑스 액센트가 아주 강한 여성 분이셨어요. 덕분에 그 직원 분이 향수를 설명하는 내내 강한 프랑스 억양의 영어를 열심히 알아 듣느라고 힘들었습니다.
이 매장을 처음 선택할 때 일부러 아르데코 양식의 빌딩을 골랐다고 하더군요. 알루미늄으로 씌워진 투명한 원기둥 모양의 오브젝트들 (his signature smelling columns in brushed aluminum)과 가구, 사진 등은 의도적으로 진열된 것이라 합니다. 프레데릭 말의 시그니처라는 향기나는 기둥 (smelling columns)은 현대 건축물에서 많이 쓰이는 재료 중 하나인 사포질되어 일정한 방향없이 새틴 느낌이 나는 알루미늄으로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프레데릭 말이 Patrick Naggar에게 1930년대 파리지앵 아파트를 컨템포러리적으로 해석한 인테리어를 구현해달라고 했다네요. 그리고 Jules Leleu라는 디자이너에게 가구 디자인을 맡겼다고 합니다.
엉빠썽을 구입하게 된 건 저보다 남자친구가 더 이 향을 좋아해서였는데요, 내돈내산이었다면 제목에 썼겠지만 남돈남산의 남자친구 선물입니다. 엉빠썽을 시향하자마자 이걸 사야한다며 저를 위해 지갑을 열더라고요. 저에게 어울리는 향을 선물하고 싶었다는 마음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아마도 자기가 제 향기를 제일 많이 맡게 될테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이전에 많은 분들이 사용하시고 알려진 팁티크 도손을 시향했을 때는 좋았다- 정도의 남자친구의 반응이 이 엉빠썽을 시향하자마자는 눈을 크게 뜨면서 이거다 라고 말했을 정도이니까요. 물론 개인 취향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합니다.
아무튼 아주 아주 오랫동안 정말 최근 5년간 라일락 항이 나는 향수와 방향제를 찾아왔던 저에게는 정말 눈이 확 뜨이는 향기였어요. 기다려왔던 향이라고나 할까요. 제가 살던 아파트 단지 앞에 있던 라일락 나무의 싱그러운 라일락 꽃 그 자체에 코를 박고 맡을 때 느껴졌던 여러 가지 향들이 동시에 났으니까요. 몇달 전엔 브룩클린에 있는 보테니컬 가든에 가서 라일락 나무들이 모여있는 정원에 가서 한참을 라일락 꽃향기를 맡고 왔는데 그 때 맡았던 살아있는 라일락 꽃향들과 거의 유사한 것 같았어요. 엉빠썽에선 살짝 흙냄새같은 것이 나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겁거나 복잡한 향은 아닙니다. 두 가지 노트의 향수에요. 오이와 라일락 향이 탑노트이고 베이스 노트로는 화이트 머스크와 cedar (나무 종류)라고 하네요. 하지만 거의 단일 노트의 향수처럼 느껴져요. 라일락향이 확 나고 제가 느낄 땐 화이트 머스크의 잔향은 거의 느끼지 못했어요. 라일락향으로 유명한 다른 브랜드들의 향수를 시향해보진 못해서 비교하긴 어렵지만 화장품 향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라일략 꽃향이 나냐고 묻는다면 단연 추천하고 싶은 항수입니다. 약간 아쉬운 점은 지속력이 짧게 느껴진다는 부분이예요. 라알락 꽃향기 자체도 강하지 않죠? 그래서인지 저에게는 아무리 여러번 레이어링을 해도 저한테는 향이 잘 나지만 지나가면서 향이 퍼진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어요. 아주 은은하게 향이 나고, 오 데 퍼퓸인데도 불구하고 체감한 향의 지속 시간은 3-4시간 정도였습니다. 향수 외에도 바디워시도 판매 중이었는데 라일락향으로 샤워하는 기분 너무 좋을 것 같네요.
프레데릭 말의 향수는 니치향수들 중에서도 가격대가 꽤 있는 편입니다. 원래 구매하려고 했던 딥티크의 도손보다 두 배 정도 되는 가격이었으니까요. 르 라보의 향수 가격대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용량은 100ml, 50ml 이렇게 구성이 되어 있는데, 가격은 50ml가 $210, 100ml가 $295입니다. 한화로 따지면, 50미리짜리가 대략 25만원 정도 하는 셈이죠.
이렇게 비싼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프레데릭 말 향수만의 특별함이 있다는 걸 느꼈던 일화가 있습니다. 엉빠썽을 몇일 써보고 너무 향이 좋아서 지인에게 말했는데, 그 지인이 향수를 모으는 분이였습니다. 그래서 그 지인과 함께 매장에 같이 방문한 적이 있는데, 장미향이 나는 향수들 몇개를 맡아보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하나를 구매를 하더라고요. 역시 프레데릭 말의 향수는 중점이 되는 노트의 향을 자연과 가깝게 가장 잘 구현하면서도 다른 향수 브랜드에서는 맡아보지 못한 깊은 향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지인이 구매했던 향수는 저도 샘플로 받았던 엉 로즈 en rose 인데요, 다른 포스팅에서 리뷰해보겠습니다. 샘플로 받은 후 주변에 나눠주기도 했었고 저도 몇 번 엉빠썽 대신에 밖에서 사용한 적이 꽤 있거든요.
프레데릭 말의 뉴욕 어퍼 이스트 매장 위치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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