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를 오랜만에 보려고 열었다가 어떤 분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어요. 책의 문장들을 수집한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는데 요즘 읽고 있는 책이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라는 말을 읽고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문장을 수집하는 사람이 읽는 책은 어떤 책일까... 하고요.
스위스 국민 작가인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는 저자가 쓴 42편의 중단편을 모은 책입니다. 평소 이렇게 중단편집이나 여러 산문을 모아 놓은 책을 좋아하진 않습니다. 소설이라면 더더욱 긴 호흡으로 끝까지 흡입력 있는 류를 좋아하기 때문에 흐름이 끊기는 듯하고 읽다 만 것만 같은 산문집은 좋아하지 않죠. 그런데, '산책자'는 달랐습니다. 시인이란 제목의 한 페이지 분량의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부드러운 와인을 마시는 것처럼 스며들었습니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가득해서 두고두고 보고 싶어서 몇 군데는 개인 소장하려고 아예 적어 두려고 합니다. 동시대 작가 카프카가 로베르트 발저의 글을 좋아했다는 것이 이해가 갑니다.
그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문장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아침의 꿈과 저녁의 꿈, 빛과 밤, 달, 태양 그리고 별, 낮의 장밋빛 광선과 밤의 희미한 빛, 시와 분. 한 주와 한 해 전체. ... 별들은 내 다정한 동료들. 창백하고 차가운 안개의 세상으로 황금의 태양빛이 비쳐들 때 나는 얼마나 크나큰 기쁨에 몸을 떨었던가. 자연은 나의 정원이며, 내 열정, 내 사랑이었다. ... 나에게 저녁은 동화였고, 천상의 암흑을 소유한 밤은 달콤하면서도 불투명한 비밀에 쌓인 마법의 성이었다. ... 주변의 모든 사물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으나 사람들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누구도 생각하려고 애쓰지 않는 것을 나는 하루 종일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나 감미로운 생각이었는지. ... 나는 아무도 아프게 하지 않았고,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나는 참으로 멋지게 그리고 보기 좋게 옆으로 비껴 나 있었다.
'시인'에서 발췌
'나는 참으로 멋지게 그리고 보기 좋게 옆으로 비껴 나 있었다'라는 문장이 마치 요즘 저 자신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가슴이 살짝 뭉클하면서도 공감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았던 고등학교 시절을 제외하고는 그 뒤에는 흘러가는 대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살았지만, 열심히 했는데도 손에 남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최근까지만 하더라도요. 주변에서 아무리 넌 잘하고 있어, 잘할 거야 라는 말을 해도 가슴에 와닿지 않았습니다. 그런 저의 현재 상태를 이 문장이 아주 정확하고 예리하게 짚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목표하는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던 과거와 다르게 현재는 목표 없이 현실에 충실하자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굉장히 낯설어요. 커리어적으로 목표를 잡고 싶은데, 그 과정이 너무 더딥니다. 동시에 제가 하는 일은 계속되고 있으니 제가 "보기 좋게 비껴 나 있는" 모습 같은 것이죠.
룸메이트랑 살 때에도 누군가에게 뭐라고 하는 것을 꺼려하고 싫어하고 반대로 상대가 저에게 뭐라고 하는 것조차도 싫어하는 저의 성향과 맞닿아 있다고 느껴지는 지점이 '나는 아무도 아프게 하지 않았고,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입니다. 물론, 생활 속에서 크고 작은 잡음이나 어떤 불편한 일들이 일어나기는 하지만요, 요즘은 그것들을 그냥 그대로 흘려보내려는 노력을 해왔고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습관화되고 있습니다.
글을 통째로 옮겨 놓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고 유려한 문장들로 가득 차 있는 '시인'을 읽고 있자니 여러 면에서 제 창의성이 건드려지는 느낌이 듭니다. 요즘 항상 하던 생각이 자기 계발서를 덜 읽고 문학 작품다운 글을 읽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읽으면서 상상력이 자극되고 문학과 예술을 소비해 왔던 지난날이 떠올라지게 하는 글 말이에요. 다시 책을 뒤적거리고 내가 읽었던 책의 구절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책... 이 책은 그런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 한 가지는 다정하고 따뜻한 글을 읽고 싶다는 욕망이었어요. 요즘의 콘텐츠들은 대부분 자극적이며 사실적입니다. 사회 고발적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걸 웃음거리로 삼아 버리기도 하죠. 책은 시시껄렁한 문체에 누구나 다 아는 내용들을 다른 말로 옮겨 놓았거나 누군가의 아이디어를 다시 모아 놓은 것뿐인 책들도 많아요. 읽으면서는 무언가를 느끼지만 그 이상은 이뤄지지 않는 책들이죠. 행동하게 하지 않고 너무 쉬워서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가만히 있게끔 하는 책들 말이에요.
그런데 '산책자'는 무언가 다릅니다. 읽으면서 팝콘이 톡톡 터지면서 부피를 늘려가듯이 머릿속에서 예전 기억과 감성과 문학적 상상력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어요. 그건 뭐였지.. 무슨 책이었지 하고 자신의 장기기억을 시험해 보게 하는 책이요. 내가 감명받았던 내용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드는 구절들로 가득합니다. 이건 어디서 본 것 같아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게 똑같거나 비슷한 문체여서가 아니라 어떤 감성을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서 책 속 다른 산문인 '빌케 부인''은 의식의 흐름대로 써놓은 주인공의 생각들이 버지니아 울프의 문체를 떠오르게 합니다.
산문집이라는 그 특징이 이렇게 와닿고 기분 좋게 느껴진 것은 처음입니다. 산문은 보다 운율이 있고 형식적인 글인 운문-대표적으로는 시와는 달리 소설, 수필 등 평범하거나 일상적인 언술을 기록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병률 시인의 시 '사람이 온다'를 통해서 시의 매력에 빠진 적은 있었지만 주로 소설을 읽곤 했었어요. 최근에는 인생 자체가 소설인 거 같아 소설을 피하기도 했었고요. 그런데 오랜만에 읽는 산문집에서 이렇게 매혹적인 글을 발견한 것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이 책을 번역한 배수아 작가가 말한 평 그대로 좋은 의미에서 "이런 것은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밀리의 서재에 이 책이 있었던 것은 정말로 행운이었습니다. 최근에 이용이 좀 낮았었는데 이 책을 보면서 구독료의 값을 제대로 하는 것 같아요. 밀리의 서재에 대해서도 리뷰 포스팅을 곧 쓰도록 하겠습니다. 책 읽는 것과 기억에 남는 문장들을 필사하면서 읽는 편인데, 아직 밀리의 서재에서 필사할 만한 책을 발견하지는 못했었어요. '산책자'가 밀리의 서재에서 읽고 필사를 하게 되는 첫 한글 책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어책은 종종 필사하곤 하거든요. 다음엔 제가 필사할 정도로 좋아하는 책들도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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